lundi 10 novembre 2008

‘손에 동전 한 푼 없다’ 징징거린 조선 양반들 - 중앙일보 / 2008-11-8

하영휘 선생의『양반의 사생활』(푸른역사, 2008)은 1800년 서울에서 태어나 충청도 남포현 삼계리(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충남 보령시 미산면)에서 몰한 조병덕(趙秉悳)의 삶을 재구성한 일종의 전기다.

조병덕은 조선시대를 쥐고 흔든 노론(老論) 화족 가운데 하나였던 양주(楊洲) 조(趙)씨, 괴산(槐山)공파의 일원이었다. 그는 같은 집안의 아저씨뻘로 철종(哲宗)과 고종(高宗)대에 삼정승을 두루 거치며 노론 종주로 활약했던 조두순(趙斗淳)과는 대조적으로 과거나 벼슬을 일절 하지 않았지만, 살아생전 ‘산림(山林) 어른’으로 존경받았다.

조선 후기에 살았던 한 양반의 전기를 구성하기 위해 저자는 약간 특별난 방법을 이용했다. 조병덕은 28년간 자신의 장남에게 무려 1700여 통의 길고 짧은 편지를 썼고, 저자는 자신이 재직하고 있던 ‘아단문고’에 상자째 쌓여 있던 고문서 더미 속에서 이 편지 뭉치들을 발견했다. 어찌 보면 저자가 특별난 방법을 이용하고자 했던 게 아니라 누구에게도 공개되기를 원치 않았던 한 양반의 사신(私信)이 150여 년 세월을 기다려 ‘임자’를 찾았던 거라고나 할까.

“고문서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건 대학 시절부터였습니다. 1980년대엔 마르크스주의 영향이 강해서 늘 역사 발전 법칙 속에서 한국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논쟁하곤 했죠. 그런데 그런 도식으로는 도저히 조선시대를 모르겠더군요. 다행히 졸업 후 89년부터 몸담게 된 직장에서 조선시대의 고서와 고문서를 원 없이 읽게 되었습니다.
요즘 나오는 대중 역사서나 영화·드라마 등이 『조선왕조실록』에서 많은 자료를 취재하고 있지만, 그건 원래 국가 기록이라서 관점 자체가 정치를 중심으로 삼고 있고, 사적인 내용도 말소되어 있습니다. 이번 책에서 시도한 일상사는 사적 자료·일기·편지와 같은 고문서가 발굴되고 읽을 수 있어야 가능합니다.”

일상사적인 방법을 통해 역사의 사실과 진실에 접근해 보고 싶었다는 저자에게 1700여 통이나 되는 조병덕의 사신은 그야말로 축복에 가까웠다. 앞서 언급됐던 『조선왕조실록』은 물론이고 문집의 편집 과정에서 또 한번 걸러진 대부분의 정통적(orthodox) 자료에서는 유교 도덕과 명분으로 도배된 양반의 공적 영역만 전해진다.

반면 조병덕의 편지는 조선시대 양반이 남에게 보이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여겼던 몇 가지 사항 가운데 특히 금전거래에 관한 기록이 상당량을 차지한다. 저자가 편지의 “솔직함에 빠졌다”고 토로하는 것과 반대로, 편지의 주인이 “이 편지는 반드시 즉시 태워야 한다”는 조바심을 말미마다 적은 까닭은 그 때문이다.

조병덕은 생계를 위해 책을 판 일이 적지 않았고, 오늘날의 택시비인 가마비를 아끼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어쩌다 손님이 갑작스레 닥치면 자신의 밥그릇에 행주를 깨끗이 빨아서 넣고 그 위에 쌀밥을 덮어야 할 정도였으니,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유력한 친척들에게 구걸을 하는 일은 당연했다.

그는 첫째 아내가 죽자 장인에게 “죽은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이 산 사람 고생보다는 유쾌할 것 같습니다”라고 썼으며, 둘째 부인이 죽자 묏자리를 구하지 못해 남의 산에 투장까지 했다. 조병덕이 편지에서 자주 사용한 관용구는 “손에 동전 한 푼 없어 꼼짝달싹 못한다”란 말이었다. 양반의 치부는 그뿐이 아니었다.

그의 큰며느리는 새로 맞은 시어머니를 쫓아내 부부가 살 집을 새로 지어야 할 정도였으니, 가장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거나 같았다. 그래서 어느 날 편지에 “다만 높이 날아 멀리 달아나 집에 있고 싶지 않을 뿐이다”고 그는 썼다.

“조병덕의 삶은 중앙지향적이었던 기호지방 양반의 일반적인 사례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영남지방은 중앙 진출이 좌절되면서 지역 내의 양반이 여러모로 결속해 유교적 도덕에 의한 가부장제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기호지방의 양반들은 삼대 동안 과거에 붙지 못하면 몰락을 면치 못했습니다.

거기다가 조병덕이 살았던 시절은 장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 국면에 들어서면서 권력을 공유하던 노론 집단의 동류의식이 무너지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유교적 가부장 사회는 조선시대를 이상적인 유교사회로 포장하려는 경향의 산물이고, 선비문화 역시 후대의 투영물입니다. 그들은 이슬을 먹는 신선이 아니었습니다.”

조병덕은 지방의 서원 세력을 향반으로 여기면서 거리를 둘 만큼 중앙지향적이었지만, 임금이 두어 차례 벼슬을 주었음에도 고향에서 나가지 않았다. 벼슬 받고 서울에 올라가 봐야 권한을 갖거나 인정을 받기 어려웠고, 굶어 죽더라도 산림으로 있어야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재 미나게도 조병덕은 스스로 “정주(程朱) 이후로 의리가 밝혀져 남김이 없기 때문에 후학은 단지 받들어 믿고 토론하여 밝힐 뿐이다”고 말한 것처럼 변변한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저자는 “저술을 추구하지 않는 유학의 한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고 귀띔한다.

“1700 여 통의 사신은 양반들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생활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사회적·경제적 특성을 엿보게 해줍니다. 조선 사회는 지연·학연·인척·과거 벼슬을 통해 많은 관계를 만들려고 하고 유사시엔 그 관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왕래망(往來網) 사회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전통은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고스란히 남아 있죠. 또 조병덕은 가렴주구를 비난하면서도 벼슬에 나간 자제배들로부터 명목전을 거두는 것을 당연시했습니다.

그건 용인된 뇌물이기도 했고, 상공업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혜와 복종으로 유지되는 ‘도덕 경제’의 일면이기도 했습니다. 이 또한 오늘의 한국 경제에서 흔히 찾아지는 특성입니다.”

조 병덕은 평생 ‘밭 가는 유학자’를 자처하며 ‘조경모독(朝耕暮讀)’과 ‘비기력불식(非其力不食)’을 실천하고자 했으나, 문자 그대로 한 번도 밭을 가는 일을 실천하거나 자신의 힘으로 먹지 못했다. 그를 먹여살린 것은 임지에 나간 자제나 인척들에게서 거둔 명목전이었고, 그 명목전은 백성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양반들을 굳이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쌀 직불금을 허위 수령한 요즘의 불한당이라 할 것이다. 사진 신인섭 기자


‘장 작가’란 줄임말로 불리는 장정일씨는 시인·소설가·희곡작가·책 평론가입니다.


장정일<957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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