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25 mai 2009

열녀의 탄생 / 강명관 지음 / 돌베개

'절개 지키는 열녀(烈女)' 그것은 음모의 산물이었다? / 조선일보 북스 / 2009-05-16
이한수 기자 hslee@chosun.com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열녀(烈女)'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사〉에는 '열녀' 혹은 '열부(烈婦)'라는 말 대신 '절부(節婦)'라는 말이 등장한다. '열부'가 '남편을 위해 죽거나 혹은 폭력을 당하여도 굴하지 않고 죽은 사람'인 반면 '절부'는 '남편의 사망 이후 개가(改嫁)하지 않은 여성'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절부'는 "아내가 죽은 뒤 다시 아내를 얻지 않은 남자"를 뜻하는 '의부(義夫)'에 상대되는 개념이었다. 아내만 남편에 대한 수절(守節) 의무가 있는 게 아니라 남편도 아내에 대해 수절의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세조 12년(1466) 편찬된 《경국대전》에서 '의부'가 사라진다. 〈고려사〉에는 "효자(孝子)·순손(順孫·조부모를 잘 모시는 손자)·의부·절부"라는 표현이 늘 함께 등장하지만, 《경국대전》〈예전(禮典)〉에는 효자·순손·절부만 남고 '의부'가 빠진 것이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로 인해 배우자가 사망하거나 부재할 경우 다시 배우자를 구하지 않는 것은 여성만의 의무가 되었다"면서 "그것은 곧 남성의 성욕만이 관철되는 사회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열녀'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세종 14년(1432) 편찬된 〈삼강행실도〉 열녀편이 보급되면서부터다. 국가가 만든 텍스트를 통해 '열녀'라는 관념이 전파된 것이다. '열부'가 '열녀'로 바뀐 것은 결혼하지 않은 여성까지 포괄하기 위해서였다. 수절한 여성에게 정문(旌門)을 세워주는 '당근'과 개가(改嫁)한 여성의 자식을 관리로 임명하지 않는 '채찍'을 통해 여성의 대뇌에 가부장적 담론을 설치하는 작업은 계속 진행됐다. 저자는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며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는 '열녀'라는 관념이 더욱 강화되고 17세기 중반 혼인제도가 부처제(婦處制·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가는 제도)에서 부처제(夫處制·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시집가는 제도)로 바뀌면서 '국가·남성의 여성에 대한 통제는 완벽하게 작동하게 됐다'고 말한다.

신윤복의 풍속화〈월하정인(月下情人)〉. 강명관 교수는‘열녀’라는 관념은 고려 말·8조선 초 등장하여 17세기 이후 정착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결론은 단순하다. '모든 것은 조선을 지배했던 남성·양반의 의도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여성의 머릿속에 주입할 텍스트를 편집과 조작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내고 국가 기구를 통해 인쇄하여 의도적으로 또 강제적으로 500년에 걸쳐 유포했다. 그 결과 그 텍스트들은 여성의 대뇌를 차지하고, 여성의 행동과 의식을 통제하게 되었던 것이다.'(553쪽)

그 러나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저자의 결론은 인륜[강상·綱常]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를 꿈꾼 당대 지식인들의 고민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현재의 관점을 과거에 투영하여 역사를 재단하는 것일 수 있다. 조선 500년간 여성은 수동적으로 종속성을 내면화하게 됐다는 설명은 당대 여성의 주체성을 오히려 폄하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성적 종속성을 강요한 최초의 공작"(49쪽)이라든지, "성적 종속성은 국가·남성의 이익을 위해 고안되고,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주입된 것'(550쪽)이란 표현처럼 책 곳곳에서 토로하는 저자의 '분노'와 '확신'은 미리 결론을 가지고 사료에 접근한 듯한 느낌을 준다.

' 열녀'라는 관념이 만들어진 것이며,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가부장제가 정착되었다는 설명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열녀'라는 의식이 만들어지고 강화되는 과정을 중국과 한국의 사서(史書), 실록과 문집 등 관련 문적(文籍)을 샅샅이 뒤져 실증적으로 제시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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