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4 mai 2009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 이욱 / 창비

왕권 강화로 바뀐 조선의 의례 / 연합뉴스 / 2009-04-20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訓要十條)를 통해 자손들에게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 등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고, 팔관은 하늘의 신령(天靈)이나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 등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의례(儀禮)의 대부분은 불교와 도교, 무속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은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전면 재편됐다. 불교, 도교, 무속 등을 밀어내고 유교가 국가의례의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최근 출간된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창비 펴냄)는 의례, 그 중에서도 기양의례(祇禳儀禮)의 유교화 과정을 ’위계질서’라는 키워드를 통해 살펴본 책이다.

기양의례란 가뭄, 홍수, 전염병 등과 같은 자연재해뿐 아니라 개인의 질병과 불행 등 일상적인 삶의 조건을 위협하는 상황을 가시게 하고자 올리는 주술적이고 비정기적인 종교 의례를 말한다.

저자인 이욱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조선의 왕과 사대부들은 기양의례를 통해 권력과 위계질서를 확립해 나갔다.

즉, “재난을 일으키는 사특한 기운에 맞서거나 절박한 상황에서 (백성은) 초월적 힘을 요청”하는데 이때 사대부들이 의례를 주도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기양의례의 유교화과정은 기양의례의 관권화(官權化) 과정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또 조선 전기에 있었던 불교, 도교 등에 대한 비판은 “권력을 종교 전문가에게 옮기는 것을 부정”하고, “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세속적 권력을 사회의 정점에 두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기양의례도 탕평정치가 시작되고, 명제국이 멸망하는 17세기를 기점으로 점차 신권보다는 왕권을 중심으로 재편됐다고 저자는 소개한다.

저자는 “사림으로 대변되는 신권 중심의 정치 시스템이 숙종과 영조, 정조로 이어진 탕평정치에 의해 무너지면서 권력은 국왕에 집중됐고, 이는 국왕중심으로 기양의례가 재편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명나라가 망하면서 조선의 왕은 중화(中華)를 계승한 유일한 군주라는 소중화론이 고개를 들었고, 이로 인해 중국 황제에게만 허가됐던 친행기우(親幸祈雨)도 조선후기 들어 점차 일상화되기 시작했다고 곁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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