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9 février 2009

세 천황 이야기 / 야스다 히로시 지음|하종문·이애숙 옮김|역사비평사

히로히토가 허수아비였다고? 근대 일본 지배한 '무책임 정치'
김기철 기자 kichul@chosun.com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사변이 발발하자 자위의 필요상 관동군 장병은 과단신속하게 과(寡·적음)로써 중(衆·많음)을 훌륭하게 제압했다… 짐은 깊이 그 충렬을 가상히 여긴다." 1932년 1월 히로히토 일왕은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을 치하하는 '칙어'를 내렸다. 사변의 주역인 관동군 참모들을 만나 치하하기도 했다. 근대 일본에 서 절대적 권위를 지닌 일왕이 중국 침략에 앞장선 것이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전후 전쟁 책임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모든 정치행동은 내각 등 정치 담당자들의 보필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일왕은 '로봇 군주'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히로히토의 말은 진실일까.

야 스다 히로시(安田浩) 지바대 교수는 메이지유신부터 1945년 패전까지 일본에 군림한 무쓰히토·요시히토·히로히토 일왕이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적 역할을 했는지를 밝힘으로써 근대 천황제의 해명에 나선다. 내대신·시종장·시종무관장 등 일왕 측근과 정권 수뇌부의 일기·서한 등의 사료를 근거로 삼았다.

야스다 교수는 일왕은 기본적으로 내각과 궁정 측근, 군부의 보필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수동적 군주이지만, 때로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친정적 권력을 행사하는 능동적 군주로 나타나기도 하며, 그럴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기적으로 조금씩 변화하는 일왕의 정치적 역할에 주목했다. 메이지(明治)시대에는 일왕의 친정(親政) 권력의 행사가 당연하게 간주됐지만, 다이쇼(大正)시대에는 일왕의 질병 때문에 친정 권력 행사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관념이 지배하게 됐다는 것이다.

쇼와(昭和)시대에는 일왕의 권력 행사는 억제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외견적으로는 친정 군주·대원수·신격적 군주로 선전되면서도 권력 핵심부에서는 천황은 국가 기관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암묵적으로 확대됐다고 했다. 패전 직전엔 다음과 같은 얘기가 도조(東條) 육군상의 내부 훈시라는 소문이 돌았다. "근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폐하가 화평하라는 칙명을 내리시면 믿고 따르는 것이며, 후자는 국가의 장래를 생각해서 비록 폐하가 분부를 내리셨더라도 먼저 간언을 올리고, 계속 간언을 올려도 윤허가 없다면 강제적으로라도 소신을 단행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택할 것이다."

그렇다고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근대 천황제에서 군주는 정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절대적 권위로 출발했다. 일왕은 이따금 친정을 실시하면서도 '입헌군주'로서 신하들의 보필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신하는 보필에 의해 천황을 움직이려 하면서도 천황의 명(命)에 의해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행동 양식이 일반화되었다. 이런 거대한 '무책임의 체계'가 일본을 전쟁으로 몰고 갔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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