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redi 15 avril 2009

함석헌 저작집 1~30 / 함석헌 지음 / 한길사

검열된 ‘함석헌의 외침’ 21년 만에 되찾다 / 한겨레 / 2009-04-03

함석헌 저작집 1~30
함석헌 지음/한길사·각권 1만4000원~2만원, 독립 발췌본 1만원

강연 등 빠진 글 보완…30권으로 새로 내
독재정권·권력 나팔수 언론에 내린 일갈
‘한민족 고난=인류해방 거름’ 가르침 등
“기독교 틀 넘은 새 정신·사상적 아이콘”

“저 신문쟁이들을 몰아내라…. 그놈들 우리 울음 울어 달라고 내세웠더니 도리어 우리 입 틀어막고, 우리 눈에 독약 넣고, 우리 팔다리에 마취약 놓아버렸다. 그놈들 소리한댔자 사냥꾼의 개처럼 짖고, 행동한댔자 개의 꼬리 치듯이 할 뿐이다. 쫓아내라. 돌로 부수란 말 아니다. 해가 올라오면 도깨비는 도망가는 법이다. 우리가 울어야 한다. 우리가 울면 우리 소리에 깰 것이다. 힘도 우리 것이요 지혜도 우리 것이다. 그것은 참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일 열린 ‘함석헌 선생 탄신 108돌(서거 20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작가 박태순씨는 1970년 4월에 창간된 <씨알의 소리>에 실린 함석헌의 이 글을 하필 인용했다. “개처럼 짖고, 행동”하는 것들이 날뛰는 세상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별로 바뀐 게 없지 않으냐고 묻고 있는 것 같다. 어디 신문뿐이랴.

한길사가 <함석헌 저작집> 30권을 새로 냈다. 1988년에 낸 20권짜리 <함석헌 전집>을 21년 만에 대폭 보완하고 편집과 디자인도 크게 바꿨다. 지난 5년간 공들여 새로 찾아낸 시 72편과 강연문 26편, 편지 39편, 에세이 11편, 동양고전풀이 17편, 인물론 9편, 대담 6편, 간디 명상집 번역물 등을 추가했다. “거의 70년에 걸쳐 쓴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확인하고 고칠 것 고치고 주를 달았다. 예전의 수록글 중에서 검열 때문에 잘려나간 부분, 완전히 누락된 것들도 찾아 넣고 찾아보기 쉽게 색인도 만들었다. 그런 작업에만 1년이 걸렸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자국 근현대 사상가들의 재해석·재평가 작업을 꾸준히 벌이면서 현재적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 일본이나 중국이 부러웠다”며 “우리는 함 선생님 얘기를 하면서도 실은 제대로 읽지도 알지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기독교 틀에 함 선생님을 가둬선 절대 안 된다”며 특히 젊은 세대가 “이 시대의 새로운 정신적·사상적 아이콘” 함석헌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했다.

권력과 체제에 대한 날선 비판을 담았던 20권짜리 전집 발간은 군사독재 종식 이후 이른바 ‘87년 체제’의 본격 시작을 알리는 사건일 수 있었다. 20여년 뒤 권력이 다시 87년 체제 이전으로의 회귀를 노골화한 시절에 이뤄지는 30권짜리 저작집 발간은 참으로 공교롭다. 박태순씨도 그걸 의식했으리라.

<씨알의 소리> 창간 2년 뒤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그 잡지는 폐간과 복간을 오갔으며 주인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에도 ‘미네르바’와 ‘촛불’ 들이 숱하게 잡혀갔다.

그 몇년 전인 1968년 <사상계> 5월호에서 함석헌은 “5·16은 혁명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하고 외친다. 그는 5·16 쿠데타를 한마디로 “강간”이라고 했다. 1958년에 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그 뒤 광대무변으로 발전해가는 함석헌 사상의 동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글이다. 그 글에서 그는 “6·25의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소련이) 38선을 그어놓은 데 있다”며 “우리는 고래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라고 단정한다. 그러면 왜 분단당했나? 그것은 우리가 일본 식민지배를 당했기 때문이고 또 그것은 우리가 “꼬부린 새우”, 곧 약소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왜 약소민족이 됐나? 씨알이 힘있게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그것은 나라 바깥 이리·호랑이들한테 꼬리치며 퍼주기를 일삼으면서 제 나라 백성을 “사정없이 악착스럽고 더럽게 짜먹었”던 양반 등 사대주의 “정치업자놈들” 때문이었다. “잘못은 애당초 전주 이씨(이성계)에서 시작됐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김부식, 그리고 나당연합과 고구려 멸망까지 간다.

“나는 6, 7년 이래 중학생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기회를 가졌으므로 어떻게 하면 그 젊은 가슴 안에 광영 있는 역사를 파악시킬가고 노력하여 보았다. 그러나 무용이었다. …드디어 나는 자기기만을 하지 않고는 유행식 ‘영휘 있는 조국의 역사’를 가르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 참담한 사실 이것을 희망과 자부심에 작약하는 젊은 혼들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생각할 때 ‘나는 왜 역사교사가 되었던고’ 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시대인 1934년 <성서조선>에 실린 이 글은 그의 고뇌의 원형을 보여준다. 민족혼을 고취시킬 ‘영광의 역사’를 가르치기엔 조선역사는 너무 보잘것없고 고통스러웠다. 나중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로, 그리고 다시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거듭나는 그의 대표저서를 특징짓는 ‘고난의 역사’관은 거기서 출발했다. 강자가 아니라 약자의 고난, 특히 영광 없는 한민족의 고난이야말로 진정한 해방, 전 인류적 거듭남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의미심장한 ‘뜻’을 읽어낸 함석헌의 놀라운 사고전환은 참담한 고뇌의 소산이었다. 고난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고 따지고 보면 세계역사가 모두 고난의 역사였다. 김경재 한신대 교수는 토머스 베리의 지질학적 개념을 빌려 지금까지 6500만년 간 이어지고 있는 신생대 대신 세계가 하나로 되는 인간과 자연 합일의 새 역사시대인 생태대(Ecozoic era)로의 인류진화 개념으로 함석헌 사상의 확장을 설명한다. 다윈과 베르그송, 샤르댕, 웰스 등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국가주의를 넘어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세계주의, 생태주의로 사유영역을 끝없이 밀고 간 함석헌 사상의 출발점은 비참한 민족현실이었다.

분단이 상징하는 그 비참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함석헌 입장에서 본 한국현대사’를 볼 수 없게 된 건 유감스럽지만, 저작집 30권은 함석헌 사상이 그가 타계할 때까지 어떻게 태동하고 변해갔는지, 그 다이너미즘을 날것 그대로, 훨씬 더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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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실천적 대부’…민중신학, 국제적 주목받아
■ 함석헌은 누구

한국 민주화운동의 사상적·실천적 대부 구실을 한 함석헌(1901~1989)은 한때 중남미 해방신학과 더불어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한국 민중신학의 탄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노장사상에 정통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저작집에도 포함돼 있는 <바가바드 기타>나 <간디 자서전>에서 보듯 인도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일본 무교회주의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그의 기독교는 이런 풍부한 동양 전통사상의 바탕 위에서 자연-인간 합일의 초종파적 변혁의 담지자 ‘씨알’사상으로 발전했다.

평북 용천군에서 태어난 그의 인생 지침을 돌려 놓은 것은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1919년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일이었다. 그 일로 학교를 나온 그는 2년 뒤 정주 오산학교에 들어가 평생스승이 되는 유영모와 이승훈을 만난다. 1924년 도쿄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가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회에 참여했고 졸업 뒤 오산학교 교사가 됐다. 1928년부터 38년까지 10년간의 오산학교 역사교사로 여러 과목을 가르쳤던 함석헌이 사상가로서 몸을 일으킨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학생들에게 조선역사를 가르치면서 1934년 무렵 김교신이 주도하던 기독교 소모임에서 그것을 설파하고 잡지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하면서부터다. 계속된 핍박 속에 그는 결국 일본식 성명 강요(창씨개명)와 일본어 수업을 거부하며 오산학교를 그만뒀고 1940년 평양 대동경찰서에 1년간 갇혀 있었으며, 그 2년 뒤에도 <성서조선> 사건으로 다시 1년을 미결수로 복역했다.

광복 직후 용암포 자치위원장과 용산군 자치위원장을 맡았으며, 1945년 9월에는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됐다. 그해 11월 공산당 쪽 발포로 많은 학생들이 숨진 신의주학생사건이 일어났다. 좌익 학생들한테서 폭행을 당하기도 했던 그가 사상자들을 돌보자 소련군 사령부와 조선인 수하들이 그를 사건 책임자로 지목해 50일 동안 구금했다. 다음해 12월 다시 같은 일로 붙잡혀 가 1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그에게 공산당이 스파이 노릇을 시키며 미행까지 하자 위협을 느낀 그는 결국 월남을 결행한다. 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피란을 간 그가 상경한 것은 1953년. 1956년부터 장준하가 발행하던 <사상계>에 집필활동을 하면서 함석헌은 대중적으로 알려졌고 더불어 한국 민주화를 향한 그의 고난에 찬 대장정이 본격화한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20일간 구금당했고, 1965년엔 한-일 국교정상화회담 반대투쟁에 앞장섰다. 1970년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해 대정부 비판 수위를 한층 더 높였으며, 전태일 분신사건이 한국 현대사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억되는 데도 그의 구실이 컸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을 조직해 영구집권을 꾀한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 저지운동에 나섰다. ‘유신헌법’ 공포 2년 뒤인 1974년엔 윤보선·김대중씨 등과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만들어 대표위원이 됐다. 1976년엔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형을 받았다. 1979년 11월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위장결혼사건으로 계엄사에 끌려가 구금당한 뒤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형 확정과 함께 형 면제처분을 받았다. 그해와 1985년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 1980년 광주항쟁도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 가택연금을 당했고 그때 <씨알의 소리>가 두 번째 강제폐간당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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