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9 mars 2009

개혁과 갈등의 시대: 정조와 19세기 / 유봉학 /신구문화사

정조의 죽음으로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는 좌절됐을까.

조선말 개혁 군주의 표상이었던 정조의 죽음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정적으로 알려진 노론 벽파의 실력자 심환지와 정조가 빈번하게 교류했다는 사실이 최근 발견된 ’정조어찰’을 통해 드러났지만, 여전히 그의 ’죽음’은 미궁 속에서 표류하고 있다.

유봉학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는 최근 출간된 ’개혁과 갈등의 시대: 정조와 19세기’(신구문화사 펴냄)를 통해 소설, 영화 등에 빈번히 등장하는 ’정조 독살설’을 일축한다. 또한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횡행하면서 정조의 개혁 작업이 중단됐고, 이로 인해 조선사회는 보수반동으로 치달았다는 주장에도 선을 긋는다.

저자는 “정조가 진보적 사상을 가진 소수의 시파와 남인 실학자들과 함께 개혁을 추진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는 설정은 사도세자와 정조, 시파, 남인을 선(善)으로 전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정조가 집권 후기 들어 화성 건축과 같은 무리한 토목공사와 왕권 강화 정책을 추구하면서 지지세력으로부터 신망을 잃기 시작했고, 이로 인한 실망과 갑작스런 병마때문에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실제로 정조가 추구한 왕권강화 정책은 시대 분위기와 역행하는 일이었다. 당시 노비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고, 양반조차 생산활동에 종사해야 할 처지에 놓이는 등 전통적 신분제가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를 암살한 노론 벽파가 정조 사망 후 정국을 주도하면서 세도정치를 이끌었다는 주장도 잘못된 상식이다.

1800년 정조 서거 후 노론 벽파가 정국을 주도한 기간은 단 5-6년뿐이었다. 1806년 벽파를 일망타진하고 나서 집권한 세력은 정조가 키워낸 시파 관료들이었고, 그들은 그후 약 60년간 세도정치라는 이름으로 조선 땅을 지배했다.

즉, 세도정치를 이끈 김조순, 남공철, 심상규, 이만수, 서영보는 정조가 가장 아끼던 최측근으로서 한때 신학(新學)과 신문(新文)에 지나치게 기울었다며 정조로부터 견책을 받기도 했던 ’북학’의 선두주자였던 것.

저자는 “정조 사후 조선의 상황이 정조시대의 개혁과 긍정적 분위기를 완전히 거슬러 보수반동의 길로 치달았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조의 의도대로 (세도정치가들이) 조선사회를 이끌지는 않았을지라도, 19세기 세도정치기의 역사는 정조시대와의 단절이라기보다 대체로 그 연장 선상에서 전개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조 시대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이 정조 사후 좌절됨으로써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었고, 외세의 침략을 자초했다는 설명은 식민사관에 근거한 오류일 뿐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다만 저자는 정조가 말년에 군주의 초월적 지위를 강조했고 이 같은 그의 정책은 변화하는 조선 사회의 정치적 저항을 받았다면서 “결국 정조는 (이런 난국을 타계하기 위해) 신임이 두터웠던 김조순에게 아들에 대한 보좌와 정국주도를 당부함으로써 외척이 주도한 세도정치의 단서를 제공하기도 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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